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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하면 떠오르는 것은 혼잡한 기차역과 터미널, 고속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 귀성행렬이다. 운전대를 잡고 자가용을 몰든, 기차표, 버스 표를 구하든 고향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교통체증이다. 명절에 대략 절반의 국민들인 2,500만 명이 이동한다는 통계도 있다. 교통망의 확충, 교통수단의 발달에 힘입어 과거에 비해 귀성길이 많이 수월해진 것이 사실이다. 인력, 축력에 의존하던 교통수단은 엔진을 활용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이제는 내연기관에서 전기를 활용한 모터가 교통수단의 핵으로 급부상 중이다.

전차 기사

 

우리나라에 근대적 교통수단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구한말인 1899년 음력 4월 초파일이다. 이때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에 전차가 최초로 운행되었다. 고종이 친히 전차를 타고 개통식을 했다 하니 당시로써는 일대 사건이었던 셈이다. 당나귀나 타던 시대에 전차의 등장은 가히 천지개벽이었다. 전차에 노부모님을 태우려고 ‘효도 전차계’까지 생겼다고 하니 그 인기는 실로 대단했다. 전차 기사가 최고로 주목받는 직업이었음은 물론이었다.

택시 기사

택시는 1896년 미국에서 세계 최초로 등장했다. 우리나라에는 자동차가 들어온 지 9년 만인 1912년에 ‘포드 T형’ 승용차 2대가 도입되어 서울에서 시간제로 임대 영업을 시작하면서 택시가 생겨났다. 당시 택시비는 시간당 6원. 1920년대 쌀 한 가마의 가격이 6~7원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택시를 대절해 서울 시내를 한 시간 동안 도는 운임 6원은 엄청나게 비싼 것이었다. 택시 기사는 당대 최고의 ‘뜨는 직업’이었다.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택시 기사는 고소득의 첨단 직종으로 인정받았다.

버스 차장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시내버스 운행은 서울이 아닌 대구에서 1920년에 시작됐다. 서울에서는 이로부터 8년 후인 1928년에 시내버스가 도입됐다. 운행 초기에는 호기심에서 50전을 내고 버스를 타는 사람들이 많아 장사가 잘 됐다. 그러나 버스비가 전차보다 20전이나 비싸 손님이 다시 전차로 몰려가게 되자 경성부청에서는 고민이 컸다고 한다. 버스가 대중교통수단으로 인기를 끌게 된 것은 도시화, 산업화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60년대부터다. 1961년에 여차장제를 도입하면서 안내 양이라는 직업이 본격적으로 부상했다. 그전까지 남자가 해오던 버스 차장은 여성으로 바뀌었고 안내 양은 시골에서 상경한 처녀들의 최고 인기직업이 되었다. 당시에는 버스 1대에 운전기사와 안내양 2명이 손님을 실어 날랐다.

앞에 탄 안내 양은 돈을 받고 뒤의 안내 양은 손님이 뒤로 타는 것을 감시했다. 행선지를 알리는 것도 이들의 몫이었다. 운전사에게 출발해도 좋다는 신호로 외치던 ‘오라이’ 소리는 안내 양의 전매특허였다. 70년대가 되면서 안내 양이 한 명으로 줄어들었고, 80년대에 접어들면서 아예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기사가 앞문에서 요금을 받고 뒷문으로 내리도록 한 시민자율 버스가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1989년에는 안내원을 두도록 한 자동차운수사업법 33조가 삭제되면서 안내 양도 사라지게 되었다.

고속버스 안내양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본격적인 고속도로 시대가 열렸다. 고속도로와 더불어 고속버스가 도입되면서 고속버스 안내 양은 여성들이 선망하는 인기직업으로 부상했다. 고속버스 안내 양은 키도 늘씬하고 미인이어야 했다. 특히, 화장실까지 딸려 있었던 ‘2층 고속버스’ 그레이하운드는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버스 측면에는 날렵하게 생긴 사냥개가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80년대 후반 자가용이 대중화되고 교통정체로 정시성이 떨어지면서 고속버스의 인기도 시들해졌다.

스튜어디스

현대 교통수단으로서 가장 인기가 높은 것은 아무래도 항공기다. 새처럼 하늘을 날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이카루스(Icarus)에서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인간은 새처럼 날고 싶은 욕망에 끊임없이 도전했고 드디어 1700년대 말 열기구를 이용해 하늘을 나는데 성공했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1900년대 초 라이트 형제가 세계 최초의 동력 비행기를 만들어 하늘길을 열면서 비행기는 인류의 새로운 교통수단으로 바짝 다가왔다. 비록 그들의 첫 비행은 초라한 12초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대 중반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하면서 1989년에는 해외여행이 자유화되었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 불과 연 50만 명 남짓하던 해외 관광객은 2007년 1,300만 명을 넘어섰다. 소득 증가와 더불어 해외여행이 본격화되면서 뜬 직업은 스튜어디스다. 해외여행에 따라 인력 수요가 크게 증가하였고 높은 보수와 수시로 외국을 드나드는 매력도 있어 인기가 높았다. 항공사 스튜어디스 모집에는 늘씬한 여대생들이 가슴을 설레며 지원했고, 여자 어린이들의 장래희망 직업 목록에도 당당히 올랐다. 미모의 스튜어디스들은 뭇 남성들에게 흠모의 대상이기도 했다.

항법사

항공기와 관련하여 사라진 직업 중에 ‘항법사’가 있다.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항법사는 항공기 운행을 위해 필수적으로 필요한 요원으로 비행기 앞부분에 있는 조종석에서 조종사와 함께 비행을 담당했다. 항법사가 하는 일은 비행기의 위치 고도, 항로, 속도 등을 계산해서 조종사의 비행을 돕는 역할이었다. 오늘날은 자동화된 첨단 시스템이 그 일을 대신하기 때문에 더 이상 항법사라는 직업이 존재하지 않는다. 1960~70년대의 비행기 항법사는 공군 근무 경험과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전문가 대우받았으며 보수도 높았다.

고속철도 여승무원

2004년 4월에는 초고속 열차인 케이티엑스(KTX)가 개통되었다. 시속 300㎞를 넘나들면서 전국을 일일생활권으로 묶어 부산 사람이 서울에서 일을 보고 다시 부산 집에서 저녁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케이티엑스 열차를 타면 세계화된 대한민국답게 ‘셰셰(고맙습니다)’로 마무리하는 중국어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케이티엑스 개통과 더불어 화제를 몰고 온 인기 직종은 지상의 스튜어디스인 고속철도 여승무원이다. 350명 모집에 총 4,700명이 지원하여 13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응시 자격은 고졸 이상 학력 소지자로 돼 있었지만, 지원자 중에는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이 50%를 넘었으며 대학원 졸업 이상 학력 소지자와 해외 유학파 출신도 2%를 차지하였다. 항공기 스튜어디스 출신도 지원할 정도였으니 인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우리 근대화의 역사는 교통수단의 변화에 녹아있으며 이와 관련된 직업들도 부침을 거듭했다. 미래의 교통수단은 친환경, 스마트, 고속화의 방향으로 진보를 거듭할 전망이고 인공지능에 의한 완전 자율주행이 실현되면 귀성길은 지금보다 훨씬 안전하고 편해질 것이다. 자율주행 차량은 졸음운전, 난폭운전으로부터 안전하고 편리한 이동 수단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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